몸은 이미 화면 쪽을 향해 있고 고개만 돌아왔다. 회색 패딩, 헝클어진 머리, 오래 앉아 있던 사람의 표정. 뒤편 모니터 두 대는 어두운 채로 빽빽한 텍스트를 띄우고 있고, 그 너머 창에서 흰 낮 빛이 들어온다. 정보가 많은 화면을 다루는 사람의 초상이 이렇게 조용한 것은 조금 뜻밖이다. 하야테 타카하시의 대시보드도 소란스럽지 않다.
그의 화면은 거의 언제나 검다. 패널은 사각형으로 잘려 격자에 앉고, 격자는 위에서 아래로 세 단쯤 반복된다. 여백은 넉넉하지 않다. 대시보드라는 형식이 원래 그렇듯 한 화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들어간다. 그런데도 답답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배경과 활자를 끝까지 무채색으로 눌러두었기 때문이다. 회색 글자는 배경보다 조금 밝을 뿐 결코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채도는 오직 데이터에만 허용된다. 청록에서 파랑으로 번지는 면적 그래프, 자홍색 막대, 주황빛 등고선, 연두색 진행 막대. 이 색들은 화면 안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빛나는 요소이고, 그래서 어디를 먼저 볼지가 색으로 정해진다. 숫자를 읽기 전에 이미 눈은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같은 규칙을 두고도 온도는 조금씩 다르다. 어떤 화면은 청록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차갑고, 어떤 화면은 주황과 자홍으로 덮여 뜨겁다. 노트북 화면은 작아지는 대신 그래프가 더 굵어지고, 벽에 걸린 큰 화면에서는 반대로 선이 가늘어진다. 크기에 따라 굵기를 바꾸는 손이 스무 점 내내 일정하다.
대시보드는 감상하라고 만든 화면이 아니다. 그런데 이 연작은 그 실용의 화면에서도 어디에 색을 쓸지가 결국 미학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낀 색만이 신호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