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만 놓고 보면 다른 작가의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연보라 벽, 노란 메모지, 초록 화분, 그리고 웃음기가 남은 얼굴. 스무 명 가운데 가장 밝고 가장 편안한 방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만들어진 화면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묵직하다. 밝은 방에서 어두운 것을 만드는 사람의 초상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의 히어로 화면은 대부분 거의 검다. 그 위에 형상이 딱 하나 놓인다. 분홍 연꽃 한 송이, 주황으로 녹아내리는 능선, 등불이 걸린 산과 지붕. 이 형상들은 화면 가운데를 크게 차지하면서 안쪽에서 열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빛이 번지는 방향이 언제나 형상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움직임을 속도가 아니라 온도로 표현한 셈이다.
화면 밖에는 금속이 놓인다. 황동 주전자, 구리 받침, 옻빛 항아리, 은빛 화병. 이 사물들은 화면의 빛을 받아 자기 표면에서 한 번 더 굽힌다. 그래서 이미지 안에는 광원이 하나인데 반사는 여러 개다. 이 반복이 정지한 사진에 시간을 넣는다. 화면이 방금 켜졌는지 곧 꺼질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장치다.
색은 좁다. 주황, 구리, 자홍. 여기에 흰 카드가 아주 가끔 끼어들어 읽을 자리를 만든다. 흰 카드는 늘 형상 아래쪽이나 옆에 조심스럽게 붙고 결코 가운데를 침범하지 않는다. 정보가 형상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이 순서가 스무 점 내내 지켜진다.
마지막에 이르면 열이 식는다. 같은 산과 지붕이 다시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회갈색으로 가라앉았고, 방에는 금속 대신 초록 화분이 놓였다. 타오르던 것이 재가 되는 자리가 아니라, 불을 끄고 방의 조명을 켠 자리다.







